[스크랩]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인간의 타고난 심성에 대하여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순자의 성악설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맹자의 성선설이다. 두학설 모두 고대동양철학의
대가들에 의하여 주창되었기에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그 학설에 의한 평가의 대상이 될지언정 어찌 감히 그들의 학설에 대하여 논할 수
있겠냐마는 지구촌 곳곳을 돌아다니다 순자의 성악설을 뒷받침 할만한 흔적을 엿 볼 수 있는 곳이 많이 남아있다. 오랜 역사 속의 얘기는 제껴
놓더라도 영상기록수단이 등장한 이후 필름을 통하여 실제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으로 멀리 서양에서는 폴랜드의 아우슈비츠, 가깝게 아시아에서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그 대표적인 곳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반세기 전에 내란을 겪었고 집안 어른들의 얘기에 의하면 다른 곳 못지 않은 끔찍한
골육상쟁을 겪었지만 6.25 한국동란은 지리적으로 지구촌의 변방에 위치하였고, 시기적으로는 컬러TV, 위성중계 등의 첨단 통신과학문명이 등장하기
전 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한국전쟁이 세계역사의 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 외에는 전쟁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겪은 참혹한 과정은 세계적으로는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의 입구
아우슈비츠 얘기를 시작하자면 유태인의 유럽 내에서의 발자취를 먼저 거론해야 할 것 같다. 2000년 전 유대왕국이 멸망하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럽 각지로 흩어진 이래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처형한 민족으로 기독교도인 유럽인들의 박해를 받으며 살아 올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민족종교인 유태교의 종교생활은 보장받았지만 유럽의 오래 된 도시에서는 대부분 게토(GHETTO)라는 유대인 거주지역이 형성되어
그들이 얼마나 유럽인들로부터 소외된 생활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유럽인들의 반유대감정은 세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유럽의 역사를 통하여 보면 중세초기에는 유대인들은 봉건제도의 구성원이 아니었고 유럽인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기에 이들은
비교적 전직과 이주가 잦은 편이어서 상업, 수공업 등과 의사 등 전문직종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고리대금업으로 통하는 금융업에
유대인들이 많이 거론되는 것은 그들은 잦은 이주생활을 통하여 재산증식 수단으로 처분이 곤란한 부동산 보다는 동산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유럽이 18세기에 들어서서 계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철폐움직임이 시작되고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부를 바탕으로
유럽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대등한 법적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새로운
인종편견에 의한 유태인말살정책이 끔찍한 아우슈비츠 대학살극을 연출 하였던 것이다.
우리한테는 아우슈비츠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정확한 지명은 폴랜드의 오슈비엥침이다. 1940년 수용소의 설립당시에는 폴랜드의 정치범수용을 위하여 시작되었지만 이곳이
유럽각지에서 기차노선으로 접근 하기 수월하고 인구밀집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폴랜드 뿐만 아니라 유럽각지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의 수용소로
변하게 된 것이다. 나치는 오슈비엥침의 유태인수용소가 수용인원이 넘치자 이곳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독일식 표기는 비르케나우)마을에
제1수용소의 10배 크기로 제2수용소를 세우게 되었으며 우리들이 영화나 전쟁기록영화 등을 통하여 보아온 아우슈비츠수용소는 바로 브제진카의
제2수용소의 모습이다.
사진 왼쪽이 브제징카 제2수용소 오른쪽아래가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이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의 정문 앞에 있는 안내소에서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점령할 당시에 촬영한, 영화감독에 의해서 연출된 장면이아닌 생생한 기록영화를 보면 "쉰들러리스트","피아니스트" 등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그린 영화를 볼 때와 다른 것은 컬러화면과 흑백화면의 차이일 뿐인데 새삼 나치의 잔혹한 면과 유태인의 비참한 모습이 비로소 현실로 비쳐지게 된다.
“일하면 자유가 된다.”(Arbeit macht frei)란 기만적인 나치의 슬로건이 세겨진 정문입구를 지나면 조용한 시골의 학교나 공장 기숙사 같은 붉은 벽돌건물이 철조망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어느 곳에서도 나치학살의 장소였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제1수용소의 28개 건물 중 몇 개가 전시관으로 공개되고 있는데 제4동, 제5동에는 당시 이곳에 끌려온 유태인들의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가방에는 한결같이 큼직한 글씨로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것으로 보아 그들은 최소한 살아 남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잃지 않았던 것처럼 보여진다.

수용소의 전시관에 들어서자 긴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첫 번째 방에는 폴랜드의 오슈비엥침이 유태인수용소로 결정된 이유를 암시하는 지도가
걸려져 있다. 그 옆에는“러시아인과,폴랜드,유태인들을 독일에서 쫓아버리자.” “유태인을 멸종 시켜야한다”는 구호가 전시되어 있으며 “쾰른의
유태인들 한테“라는 편지들이 전시되고 있다.
복도에는 줄무늬 수용복을 입은 유태인들의 정면과 측면의 그리고 45도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
등의 자료가 공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람객들의 눈을 끄는 것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이 의사 앞에서 진찰 받는
모습이었다.
전시관 유리벽안에 전시된 유태인들의 유품에는 가방뿐만 아니라 칫솔, 안경, 구둣솔, 거울 등 재활용이 가능한 모든 물품이
보관되고 있었고 심지어는 유태인들이 처형되기 전 깎은 체모까지도 보관되고 있었다. 재활용물품이야 전쟁시절에는 물자부족 때문에 재활용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머리카락 등 신체의 일부를 이용하여 비누나, 재떨이, 카페트나 쿠션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재활용이라기 보다는 나치의
광기가 바탕에 깔린 정책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용된 유대인들의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이곳에서는 사치일 뿐, 칸막이 없이 일렬로 늘어선
변기에서도 그들의 대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기야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포기한 채 지내는 이들한테, 유태인의 인간취급을 거부하는
나치 앞에서 인격체로서의 “대우”라는 단어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전시실 복도에 걸린 유태인들의 사진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서 가스처형실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장소는 제11동 건물일 것이다. 이곳에는 개인적인 처벌을 내리는 시설이 있는데,
사방 1미터의 공간에 4명을 가두어 놓는 방, 환기창도 없는 좁은 방에 만원지하철을 타듯 많은 사람을 가두어 질식시키는 방, 앉지도 서지도 못할
좁고 낮은방 등 상상하기도 힘든 징벌을 내리는 시설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특히 나치치하 폴랜드의 반체제 인사인 콜베신부가 굶어 죽으라는 처벌을
받은 다른 수용자 대신 갇혀 죽은방 앞에는 그를 추모하는 폴랜드인의 참배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죽음의 벽 - 유태인의 총살장소
제11동 건물이 악명 높은 것은 이 외에도 밖에 있는 죽음의 벽(Death Block) 때문이다. 이 곳은 제11동의 감방에서 수용된
유태인을 총살하던 곳으로 이곳을 찾는 유태인들이 헌화한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다. 당시 유태인들이 벌거벗긴 채 감방에서 끌려나와 이
담벽에서 처형되는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는 누구나 눈시울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유태인을 총살시킬 때나 개스실에서 처형할 때나 나치는 그들을 꼭
벌거벗겨서 죽음의 길로 보낸 것은 그들의 마지막 길까지 수치심으로 짓밟으려는 생각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의 개스실입구
아우슈비츠수용소의 핵심은 아무래도 개스처형실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지만 이 곳의 생활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스스로 철조망에 매달려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그들이 당한 고통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것 같다. 아우슈비츠의 개스실은
단순한 콘크리트벽으로 둘러싼 밀폐된 210평방미터의 좁은 방으로 건물 위로 뻗어 있는 굴뚝만 아니라면 이곳이 참혹의 현장이란 것을 알 수 없다.
이 좁은 공간에서 최대 2000명까지 처형하였다고 하니 그 옆에 있는 시체소각 시설로는 쏟아져 나오는 시신들을 처리하지 못하여 인근 공터에
그들의 동료들 손에 의하여 매장되었다고 한다.
브제징카
제2 유태인수용소
브제징카의 제2수용소는 나치의 만행을 그린 영화 속에 나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델로 수용소 중심부를 관통하는 기차길과 그 양 옆에
광활하게 늘어선 300여동의 목조수용소 건물은 대부분은 파괴 된 채로 남아있다. 기초공사도 없이 습지에 나무판자로 만든 수용소안은 마굿간만도
못한 시설로 한 때는 이곳에 동시에 10만명까지 수용하였다고 한다. 나치에 의해 유태인학살이 저질러진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 그 동안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 종교인들이 이곳을 방문한 기록을 자료 속에는 가해자였던 독일의 콜 수상도 포함되어 있어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사죄하는 사진도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는 베를린필하모니와 이스라엘필하모니의 사죄와 용서가 오가는 합동연주회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도 그 동안 금지하였던 반유대인의 상징적 음악가인 바그너의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어느 한 구석에서도 그래도 우리들은
할 일을 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독일인들의 목소리는 아직은 들리지 않는것 같다. 지난 봄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행사에서 일본을 직접
거론 하며 나무라는 연설을 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화해는 아직도 멀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