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형 A형
호박처럼 둥글게
한밤중에 홍두깨 봉변을 당한지 오늘이 나흘째지요. 그날 이후 복도에서라도 우연히 옆집 사람들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표정이 어떨 것인지? 그리고 소심한 A형인 나는 어떻게 표정관리를 해야 되나 염려가 되기도 하던 것입니다.
마누라가 혹시나 낮에 마주치기라도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두 번 다시 그 인간들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정색을 하는 터라 속으로 궁금증만 삭히고 있었는데 어제 낮에까지만 해도 복도에서 마주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완전 일방적으로 당하긴 했지만 그렇게 서로 낯붉히고 소리를 지르고 했으니 벽을 이웃하고 살면서 안 만날 수는 없는 일이라 참 마음이 찜찜하고 불편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마누라랑 저녁운동을 가려고 복도에 서 있다가 슬 멈추는 엘리베이트 안을 보니 옆집 아저씨가 타고 있는 겁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저 자식 꼴 보기 싫어 걸어 내려갈란다!" 하고 몸을 돌리는데 “뭔 죄졌어!” 하며 마누라가 나를 꽉 잡는 겁니다. 20년 넘게 살면서 가끔 아주 가끔 보게 되는 용감한 O형의 기질이 그때 나타나더군요.
옆집 주인이 엘리베이트에서 나오는데 마누라가 눈을 똑바로 뜨고서 아주 도전적으로 째려보니 그 양반 기가 팍 죽어서 달리듯이 저거 집으로 들어가 버리더군요. 현관문 키 번호를 누르는데 손가락에 모터가 달렸더라고요.
근데 1층에서 엘리베이트를 내리는데 이런! 귀가하는 옆집 아주머니를 또 만난 겁니다. 소심한 A형은 다시 표정관리에 들어가려는데 옆집 아주머니는 예전처럼 얼마나 살갑게 인사를 하는지? 마누라나 나나 둘 다 그날 저녁 봉변의 후유증에 빠져서 그 인사를 받지도 않았지요. 그러니 옆집 아주머니는 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그러나마나 우리는 휙 지나쳐 운동을 하러 갔습니다.
어쨌거나 산책을 하면서 추리를 해보니 옆집 주인이 술김에 혼자 지랄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저거 딸이 안 이뿐 걸 잘 알고 있는데 당신이 이뻐졌다고 하니 화가 난 게 아닐까?” 하니 마누라가 “나는 딸이 없어서 모르지만은 만약 내 딸한테 이뻐졌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아서 밥이라도 사주겠다!” 하더군요.
그러면서 “내가 뭔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거 딸이 이뻐졌고 살이 빠졌다고 말했더라면 당연 저거 딸한테 내가 사과를 해야 되는 일이지만 전혀 그런 뜻이 없었는데 새벽 1시 30분에 남의 집에 그 지랄을 한다는 건 무식한 거고 인간도 아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마라! 하며 또 열을 받는 겁니다.
복도의 방화문만 닫으면 나란히 사는 두 세대가 이런 어이없는 일로 서로 불편하게 살아야 되다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렇다고 정말 아무 잘못도 없는 거의 10년이나 나이가 많은 우리가 화해하자고 찾아가는 것도 격식이 아니고,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도 세월이 약이라고 살다보면 저절로 화해가 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