횟감
밤늦게 생선 다듬기도 처음
저녁밥을 외롭게 혼자 먹고 있는데 마누라가 연신 뭘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며칠 전부터 저녁밥을 혼자 먹게 되었습니다. 학원 수업시간이 어중간하게 조정되는 바람에 아들놈이 좀 일찍 저녁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놈이 혼자 먹으면 밥맛이 없다고 저거 엄마를 조르는 바람에 퇴근하는 나는 늘 혼자 식탁에 앉게 됩니다. 참 밥맛이 없습니다. 아들이냐, 서방이냐? 양자택일 잘해서 밥을 먹도록 하라고 엄명을 내렸지만은 저는 늘 혼자 밥을 먹습니다..ㅠㅠ.
요새는 아침부터 종일 회의라서 점심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먹고 들어와 오후 회의 준비하느라 뛰어다니다 보니 집에서나마 느긋하게 밥을 좀 먹고 싶은데 유일한 밥상머리 상대인 마누라까지 자식한테 뺏기고 보니 사는 게 말이 아닙니다.
마누라가 왜 안 오지? 하며 기다리기에 누가 오는데 했더니 속초에 사는 언니가 횟감을 한 박스 보냈다고 합니다. 동서가 속초 앞바다에 나가서 낚시를 했다나 엄청 많이 잡았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 생선이 일찍 도착했으면 요리를 해서 한잔하게 해줄 수 있었는데 늦게 오는 바람에 실력 발휘를 못해 아쉬웠나 봅니다.
싱싱한 회를 좀 먹나 싶다가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티비를 보고 있는데 8시 반이나 지나서 경비실에서 택배를 찾아가라고 인터폰을 하더군요. 슬리퍼를 신고 경비실에를 갔더니 택배 가지러 온 주민들이 몇몇 기다리는데 구석에 아이스박스가 하나 보이더군요.
이름도 모르는 물고기
동서가 택배를 보낼 때에 아마 2시쯤 도착할 거라고 했다는데 왜 이리 늦었나 싶어서 경비아저씨한테 이게 언제쯤 도착한 거냐고 물었더니 오후에 일찍 온 거라고 합니다. 참 말문이 막히더군요. 택배가 오후 2시쯤 왔으면 얼른 세대에 알려서 찾아가게 해야지 아이스박스에 든 생선이 상하면 어쩔 거냐고 했더니 보통 택배는 모아서 저녁에 한꺼번에 연락을 해드린다고 그게 뭐 잘못됐냐는 표정입니다.
에이....고급 아파트에 못 사는 내 잘못이지 싶어서 두말 않고 무거운 걸 들고 왔는데 그새 속초에서 전화가 왔는지 같이 보낸 다른 형제들은 다 받았다는데 우리는 왜 이리 늦은 거냐고 궁시렁거리는 겁니다. 그려서 경비실에서 이러쿵저러쿵 했다더라고 일러바쳤더니 그 성질에 또 관리실에 전화해야 된다고, 관행을 고친다니 어쩐다니....
좌우지간 박스를 뜯었더니 얼음은 그냥 물이 되어 횟감으로는 택도 없겠는데 이름도 모르는 쬐맨한 생선을 얼마나 많이 보냈던지 밤 12시 가까이 둘이서 그거 대가리 자르고 내장 손질한다고 허리 꽤나 아팠네요.
아침에 매운탕이라고 끓여줘서 먹긴 했는데, 잠을 옳게 못자서 그런지 솔직히 뭐 특별히 맛이 있는 거 같지도 않아서 대충 국물이나 떠먹고 말았는데, 마누라는 피붙이가 보냈다고 그러는지 속초에서 겨울철에만 나는 생선이라 비싼 게 아무래도 더 맛이 있네 마네 해가면서 그 큼지막한 매운탕 그릇을 다 비우는 겁니다.
모르긴 해도 아이스박스 한통인 그 생선을 다 먹으려면 족히 몇 달은 걸릴 것인즉 안 봐도 비디오로 나중에는 서로 너 먹어라 나 먹어라 하면서 입에 물릴텐데 솔직히 아는 사람들한테 많이 나눠줬으면 싶은 것이 진심입니다. 근데 아직 그 말을 꺼낼 단계는 아니겠지요? 냉장고 전기세만 이빠이 내는 거 아닌지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