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저편
겨울철만 되면 코가 맹맹해지고 누우면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막히던 것이었다. 단골 이비인후과 의사는 알레르기라 하면서 완치할 방법은 없으나 증상은 개선할 수 있다며 으례 알레르기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었다. 단, 코가 막히지 않으면 복용하지 말라는 단서와 함께. 그게 쭈욱 몇 년간이었다.
올겨울에도 변함없이 그놈의 맹맹함이 찾아와 약을 처방받았는데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듣지를 않은 것이었다. 참다못해 한 봉지를 더 복용했으나 무소용이었다. 나이 들면 하루하루가 다르다더니 그 말하기 쉬운 면역력 저하인가 싶기도 하고? 그 병원을 또 가봐야 하나 어쩌나 하다 가봐야 듣지도 않는 알레르기 약을 또 줄 텐데 싶어 친한 약국에 가서 오트리빈이라는 코막힘 해결 스프레이를 하나 샀다. 그거 정말 신천지였다. 막힌 코가 정말 30초 이후에 고속도로가 되는 거였다. 기적이란 게 이런 거 아닐까? 싶었다.
근데 그게 알고 보니 영구적 치료제가 아닌 일시적 증상 완화에 불과했고 뿌려줘야 할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는 것이 폐에 좀 안 좋다는 얘기까지 들리는 것이었다. 어쩔거나? 답답한 놈이 우물 판다고 혹시나 무슨 다른 치료제가 개발되기라도 했나 싶어 할 수 없이 그 병원을 다시 갔다. 근데, 아이구머니..... 30여 명이 대기 중이었다. 5시에 모임이 있어 도저히 시간이 맞질 않아 망설이다 우연히 아내가 한번 가보라던 다른 병원이 생각났다.
조용했다. 간호사 둘이 카운터에서 뭔가 재미난 얘기로 웃고 있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진료실에는 젊은 의사가 컴퓨터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신분증을 내밀어 등록하고 좀 앉아 있으니 의사가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시라고 한다. 간호사는 뭐 하는 것이여? 하하
문진하기에 다니던 병원 의사를 얘기하고 알레르기라고 해서 코가 막힐 때마다 약을 복용했다고 말하니, 아! 하라고 해서 목구멍, 콧구멍을 잠시 구경하고서는 “알레르기 아닌데요!” 했다. 왓더퍽! 그럼 의사님 둘 중 하나는 돌팔이?
3일분 약과 치료용 스프레이 하나 처방받고 돌아와 이틀째 복용하고 스프레이는 횟수 제한 없이 뿌리라고 해서 썼는데 첫날 제외하고는 코가 안 막힌다는 것이다. 몇 년간을 알레르기 약을 처방해준 그 썩을 놈은 뭐지? 의사를 잘 만나면 죽을 목숨도 산다더니 너무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라 3일이 지난 후 다시 그 병원을 방문했다. 젊은 의사는 친절하게 더 이상 약을 쓸 필요가 없으시다며 스프레이만 하나 더 처방한다는 걸 혹시 모르니 3일치 약을 더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알레르기가 아니면 뭐였냐고 물어봤다. 그냥 단순한 코감기라는 것이었다. 예전의 그 의사는 진짜 몇 년간을 완치는 안 되고 증상만 개선되는 약을 처방해준 것이었다. 주치의라 해서 한 인간만 곧이곧대로 신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확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