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차
차가 한 10여년을 구르고나니 삭신이 노곤한가 보다.
어제 퇴근 무렵 알아듣기 가뜩이나 힘든 코쟁이 말을 무슨 술 취한 애 모냥으로 홍야홍야홍홍홍 하더니 아예 명줄을 놓고 말았다.
안 그래도 이 척박한 삶의 경쟁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명줄을 법에 있는 날까지 붙여 나가려면 자나깨나 오고가면서 영어 한 줄이라도 듣고 외워둬야 할 판인데 카세트가 고장이 났으니 참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식후 댓바람에 지정써비스센터에 연락을 해보니 오디오 부서는 따로 있다해서 돌고돌아 찾아 나섰다. 날씨는 푹푹 찌는데 오디오 기사는 9시 반 출근이라 해서 한참을 기다렸다. 높으신 기사어르신 옷 갈아입고 한대 피고 장갑 끼는데 또 30여분 보냈다. 누가 기술자 대우 안해 준다 했나?
기사 양반 차 한번 인간 한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오디오고 뭐고 차 바꿀 때 됐네요! 한다. 짜슥이 날도 더운데 염장부터 질르다니 고순가 보다. 오디오는 새 것이 13만냥 중고가 8만냥이란다.
어저께 받은 보험 재계약 설명서를 보니 내 차의 보험가액이 70만원이었는데 오디오가 13만원이라면 애보다 배꼽이 더 큰거 아닌가?
새오디오 달아서 차 팔면 기사 니가 83만원 받아 줄래? 뻘줌하니 계산을 더듬고 있자니 이 기사어르신 하시는 말씀이 손님! 차라리 폐차장 가셔서 오디오 싸게 하나 구해 오시면 수공비만 받고 달아 드릴께요! 한다.
더 진한 육수를 줄줄 뽑으며 폐차장으로 달렸다.
한여름 뙤약볕 속 육중한 프레스 밑에는 한때 엄청 사랑 받았던 유수한 승용차들이 무심하게 찌그러져 가고 있었다. 내 차도 이리 올 때가 다 되가나 보다. 여기가 바로 차 장례예식장이다. 아이고 아이고.....?
정말 노동자다운...눈알 빼고 거의 기름에 절은 모습의 인부가 먼지가 새카맣게 앉은 오디오를 하나 건네주는데 손가락 누른 자리마다 페인트가 총총 벗겨진 것이 엔간이 오래탄 차에서 빼놨나 보다. 1만5천냥이란다.
건네주면서 하는 말이 이거 카센터 가면 붙이는데 3만원 달라고 할건데 집에 가서 볼트 몇 개 빼고 전선 그대로 끼우면 됩니다. 한다. 하긴 살펴보니 별로 어려울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파트 주차장으로 와서 창문 전부 열어 놓고 카오디오를 해부했다. 온몸이 물걸래가 다 되도록 연구를 해서 있던 걸 빼내고 헌걸 다시 끼웠다. 생각보다 쉬웠다. 3만냥 벌었다.
휘파람 날리면서 시동을 켜고 스위치를 켰다. 근디 왜 이리 조용하냐? 주파수가 안 맞더라도 라디오에서는 바람 부는 소리라도 나야 정상인디.... 이러언 제엔장....먹통이었다. 라디오는 고사하고 테이프에서도 미국넘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룐 신발끈!
숨이 뻘뻘 끓는 걸 참으면서 다시 그 험악한 화장장으로 갔다. 물러 달랬다. 기름덩어리 아저씨 무표정하게 5처넌 주슈! 하면서 2만냥을 준다. 그랬다. 다시 오면 물러 주고 안 오면 팔아먹는 것이다.....폐차장에서 제대로 소리 나는 걸 기대한 내가 바보다!
땀이 비 오듯 하는 것이 얼른 가서 에어컨 밑에 드러눕고 싶다.
오디오를 빼낸 차안이 무슨 해골바가지 모양 뻐꿈한 것이 엄청 보기 더럽다. 원래 것이나 다시 조립해서 EBS로 회화나 듣고 테이프는 집에서 듣지 뭐.....그렇게 작정을 하고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산다는 게 다 맘 묵기 아니겠는가?
주차장으로 돌아와 다시 문을 열어제끼고 오디오를 조립했다. 이빨도 제것이 제일 낫다고 정갈하게 탄 차인 만큼 소리는 안나도 우선 보기에는 멋지다. 어디 폐차장 걸 붙이려 했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나 해서 몇 번이나 테이프를 넣어 보았다. 역시나 요지부동이다. 근디 아이구머니! 큰일이다. 도대체 그넘의 폐차장 오디오 넣기 전에까지만 해도 목소리 낭낭하게 나오던 라디오가 왜 갑자기 먹통이 되었으까나?....
쏼라쏼라 미국놈 말이 태평양을 건너오는 소린지 파도치는 소리만 쐐앣괘액 나는 것이 도대체 말이 안나오는 것이다. 주파수가 아파트에 가려 그러는 것이려니 해서 도로까지 운전해 나가봤으나 역시나였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있나? 반풍수 뭐 한다더니 완죤히 오늘 그 짝이 났다. 땡볕 열기가 갑자기 두배로 치솟으면서 이마빡에 현기증이 다 인다. 드라이버랑 공구를 트렁크에 처넣고 거의 기다시피 집으로 올라왔다.
에어컨 밑에 찰삭 배 깔고 누워서 야금야금 삶은 옥수수 까먹고 있던 마누라 내 몰골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 하는 말이 어디 가서 씰데 없이 땀 빼고 오냐고? 그런다. 참 도사다. 앉아서 천리를 본다고 내가 씰데 없는 짓 하는 걸 어찌 알았을까? 돗자리를 하나 사줘야 되겠다.
좌우지간 이 일을 어찌할까?
오디오를 갈아야 할까? 차를 바꿔야 할까? 영어공부를 포기해 버릴까? 돈 안드는 맨 후자를 선택할 확률이 제법 높은 것 같다.
와우 정말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