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는 늘 뒤척이다가 서늘한 새벽녘에 곤히 자고 있을라치면 한 지붕 밑에 사는 여자가 산엘 간다고 떨끄덕거리며 현관문 잠그는 소리를 내 잠을 깨운다.
겉으로 봄새로 전혀 달라진 것 같지가 않은데 체중이 3kg씩이나 빠지고 바지가 헐렁하게 배가 들어갔다는데 기분 맞춰줄랴면 “응” 그래보인다! 라고 해줘야겠지만 속으로는 전혀 아니올씨다이다.
한 6개월을 접어들면서 이젠 쪽수까지 맞춰 아침산행을 하는 모양인데 먹고 남을 만큼 사는 집 여자들과 어울리는지 가끔 같이 밥을 먹고 와서는 사람 기 죽이는 말들을 늘어놓으니 생각 같아서는 그놈의 등산팀에서 그만 빠져 나왔으면 싶다.
예를 들자면 누구는 70평에 산다느니 누구네는 거실에 스탠드바가 있더라느니 차가 에쿠스라느니....휴가는 괌에 보름을 간다느니.....하는데 어이 마누라 보시게! 참새가 황새를 따라갈려면 우찌되는지 알지...그냥 구경만 하는 걸로 끝내시지 그랴! 하면 얘기도 못하느냐 면서 뿔딱지를 내니 그 참 등산 잘 갔다 와서 왜 애민한 내를 잡느냐 이거다.
근데 최근에는 이 마누라가 영어회화에 상당히 관심을 가지는 바 그 연유를 캐봤더니 등산길에서 늘 비슷한 시간대에 혼자 산에 오는 코쟁이를 한사람 만나는 모양인데 조각처럼 생긴 얼굴에 키가 2미터에 가까운 것이 서구유럽의 신사답게 살살 눈웃음치며 친절하기가 사람 간을 녹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등산길에서 만날 때마다 영어 한두마디 주고받는 재미에 빠진 것이었는데 오늘은 무슨 영어대화를 했는지가 그날 아침식사 자리의 주메뉴가 되곤 했다. 처음에는 하이로 시작해서 굳모닝하다가 해브나이스데이로 발전하는 거 같더니 냉중에는 혼자 오느냐? 어디 사느냐하다가 결국에는 인근에 있는 K대학의 원어민 교사이고 총각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저께 아침에 산을 갔던 마누라가 비에 옴팍 젖어서 들어왔는데 시무룩한 것이 식탁에서 늦둥이가 오늘 영어 뭐했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던 거였다. 나도 별 생각이 없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어제 호프 한잔하러 간 주점에서 마누라 말하기를 그날 아침에는 영어대화를 준비 못해 가지고 무슨 말을 해볼까 생각하던 중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딱 마주치니까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데 이 코쟁이가 먼저 “ 아주머니 안뇽하세요오?” 하며 씩 웃더라는 것이다.
우리말을 그렇게 잘하면서 내가 아침마다 영어하는 걸 보고 얼마나 웃었겠냐 싶어서 김이 확 샜다는 것인데 이보쇼...외국어라는 것은 그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공부가 되는 것이네! 했더니 그래도 그렇지 우리말을 잘하는 외국인한테 우리말 놔두고 영어 하는 게 이상하지 않냐는 것이다.
이런 이런...코쟁이 글마가 좀만 더 참고 굳모닝 유투! 하고 지나갔더라면 우리집에 영어박사 한사람 탄생할 것을.....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아무리 새벽잠이 쏟아지더래도 내가 이놈의 코쟁이를 만나 좀 따져봐야 할 일이로다.
'세상야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드컵 연속 진출이라고? (0) | 2005.08.18 |
---|---|
우스개 (0) | 2005.08.10 |
살아가야지..... (0) | 2005.07.20 |
담배농사를 어쩌라고! (0) | 2005.07.19 |
삶과 죽음 (0) | 2005.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