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만나는 가지마다 다른 목소리로 운다

화난야그 97

신뢰의 저편

겨울철만 되면 코가 맹맹해지고 누우면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막히던 것이었다. 단골 이비인후과 의사는 알레르기라 하면서 완치할 방법은 없으나 증상은 개선할 수 있다며 으례 알레르기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었다. 단, 코가 막히지 않으면 복용하지 말라는 단서와 함께. 그게 쭈욱 몇 년간이었다. 올겨울에도 변함없이 그놈의 맹맹함이 찾아와 약을 처방받았는데 어느 날 저녁 갑자기 듣지를 않은 것이었다. 참다못해 한 봉지를 더 복용했으나 무소용이었다. 나이 들면 하루하루가 다르다더니 그 말하기 쉬운 면역력 저하인가 싶기도 하고? 그 병원을 또 가봐야 하나 어쩌나 하다 가봐야 듣지도 않는 알레르기 약을 또 줄 텐데 싶어 친한 약국에 가서 오트리빈이라는 코막힘 해결 스프레이를 하나 샀다. 그거 정말 신천지였다. 막힌 코가..

화난야그 2025.03.28

앵두

구산동 마리아플로워 앞 둑길에 앵두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열흘 전에만 해도 푸릇푸릇한 열매가 주저리주저리 달려 있었다. 작년인가 이른 시기에 여자들이 나무 아래에서 분주히 움직이길래 뭘 하나 보았더니 그 앵두를 따던 것이었다. 아무리 주인이 없어도 그렇지 산책하는 시민의 볼거리인데 좀 심하다 싶었는데, 아이고 오늘 아침에 보니 딱 한 알 남기고 싸그리 훑어갔다. 간신히 잎 속에 숨어 한 알 남은 앵두 보기가 미안할 지경이다. 어디에 쓰려고 푸른 빛이 가시기도 전에 그렇게 따 갔을까? 너무하다. 경상도 말로 정말 숭악하다. 아무리 앵두주가 피부에 좋다지만 정말 심하다. 도심에서 앵두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구경하게 좀 놔두지 사람들 너무 영악하다. 욕심이 도를 넘는다!

화난야그 2024.05.16

능력을 보여 주소서

그녀는 2번을 찍었다. 보수 중에 상보수, 내가 보기엔 꼴통 보수에 가깝다. 항상 김X신을 영부인님이라 깍듯이 호칭하고 학위논문이 표절이라는 뉴스에 불같이 흥분한다. 일가친척이나 형제간에도 정치 얘기는 금물이지만 그녀를 보면 가끔은 정말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학대학을 나왔고 흔하디흔한 시인이면서 전도사다. 그런데 정치 이야기만 빼면 그녀는 너무 순수해서 언행이 항상 나이 든 이쁜 소녀다.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선생님 책은 너무 재밌어요. 읽느라 늦잠을 잤어요’ ‘안 그래도 숱이 적은데 다 빠져서 늘 빵모자 쓰고 있네요!’ 암이란다. 남편 되시는 분도 같은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걸어 나와서 대중과 호흡하고 언젠가 함께 갔었던 50년 전통의 봉리단길 중국집에서 자장면 먹기는 어려울 것 ..

화난야그 2023.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