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하늘나라 가시기 전 두고 두고 말씀하신 게 있는데 바로 일제시대 때 징병가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다. 한번은 면장이 지정하여 징병장소로 출발했다가 할아버지가 위독하다 하여 귀가하였다 했고 한번은 제대로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탈출하셨다 했다.
간고등어 한 마리로 하루를 연명하면서 기차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가신 이야기며 배가 고파 남의 밭에 무우를 뽑아 먹다가 총살당한 동료들 이야기며.....힘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온갖 고초를 겪다가 살아 돌아와 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시다 가셨다.
최근 몇 년전 그런 일제 치하의 희생자들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대책이 있다하여 아버지 가신 후 그 행적을 더듬어 등록을 해보고자 고향을 찾아갔으나 당시 면장을 지내신 그 양반은 도피를 해서 행적이 묘연했고 당시 일제시기를 지낸 많은 아버지 세대들이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던 것이다.
솔직히 형제들은 포기해 버린 것이다. 나라차원의 대책을 비웃어 버린 것이다.
낼모레 80연세이신 장인어른 아직 농사를 짓고 계신데 6.25 참전용사 훈장과 월 5만원의 참전명예수당을 받고 계신다. 이 제도가 처음 시행될 때 장인어른 사위가 공직에 있다고 전화를 하셔서는 “나라가 이제 호국용사들한테 관심을 가지는가 싶다”고 매우 기뻐하셨다. 7년간의 생사를 넘나들었던 군생활에 대한 보상이 그게 전부다.
어제 현충일!
하루 전날 직원들 조기 게양하라고 공문을 열람시켰었는데 내 자신이 태극기를 내다 걸지 않았다.
아침 뉴스를 보노라니 6.25와 월남전에 참전했던 용사들의 미망인과 가족들이 국군묘지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고....한쪽에서는 시신도 건지지 못한 장병가족들의 원망이 쏟아져 나오고.......잠시 후 미국의 자국 병사에 대한 국가적 지원과 사후대처가 비교되던 것이다.
이어 북한과의 열차시험 운행 조건으로 8000만 달러어치의 옷과 신발을 만들 수 있는 원자재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대북합의가 발표되는데.....북한의 요구사항은 다 들어주면서 우리 측의 요구사항은 한 글자도 문서화하지도 못했다는.....
그냥 xxx라고만 했다.
내 아이들 자라면 군대를 보내겠다는 그런 택도 없는 망상을.....할 필요가 뭐 있는지를.....우리 형님 청룡부대 포병으로 월남 갔다 오더니 말을 더듬기 시작해....늘 우리 엄마 한이 되었더라....ㅊ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