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 쉼터
생명이 다하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생과 멸의 조화가 아니겠는지요? 이름이나 시대를 같이 산 기억도 없이 조상이라는 이유로 해마다 이 맘 때면 예초기 소리로 잠든 영혼을 깨웁니다.
6대조 할배까지라니요? 3대조 정 안되면 4대조까지만 벌초 하자는 말이 또 목구멍으로 치올라 옵니다만 늘 시도로 그치고 말지요. 그나마 촌에서 소꼴 정도나 베어 본 놈이라야 예초기도 다루지 머리수만 채우는 사촌들 조카들 와글와글 해도 진도 안나갑니다. 해마다 세어보는 봉분수....이제는 겁이 다 납니다.
고향집감나무밭
늘 시간에 쫓겨 산을 내려오면서도 밤 까먹고 사진 찍는다고 노닥거리다 한밤 중에 귀가하는 사태를 만듭니다. 벌초를 소풍처럼 하자는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럴려면 벌초 할 봉분수를 줄여야지요.
따먹을 사람이 없는 고향집 감홍시
내일 쯤 몸살이 덮칠 것 같은 예감에도 불구하고 기차시간을 놓친 숙부와 사촌들을 태우고 50km 밤길을 달려 전철역까지 모셔다 드리자니 온 삭신이 부숴지는 듯 합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적엔 불호령 한번이면 세빠지게 벌초를 해서 늦어도 세시면 마무리가 됐는데 그나마 감독이 안계시니 봉분만 하자! 제단까지는 해라! 이래저래 말만 많고 더디기만 합니다.
조카랑
세월이 흐르니 숙부 형님들 다 힘없어 하시고 하나도 반갑지 않은 벌초 지휘권이 나한테로 넘어옵니다. 도시 생활만 해온 사촌들 조카들...장정 여덟 중에 낫질 쪼매 해본 인물은 나와 동생이 전붑니다.
벌초총대를 멘지가 몇 년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다가 돌아누우면서 꿍꿍 앓으니 좀 주물러주지는 못할망정 미련스럽다고 마누라는 잔소리만 합니다.
올 때 형님이 도지세로 받은 쌀 한가마니를 주었기에 덜 피곤하지 그도 아니었으면 오늘 출근도 못할 뻔 했습니다. 벌초문화...묘제문화...이런 것 좀 새롭게 정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벌초가 효의 기준이 되는 시대는 갔습니다. 이런 의식들이 우리 세대 후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