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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야그

19층 아지매

★진달래★ 2022. 12. 25. 10:28

 

아내는 언니라 불렀다.

살가운 혈육은 아니어도 입주 때부터 아파트 같은 동에 살면서 마음이 통했나 보더라. 19층 현관 앞에는 비싸 보이는 골프백이 두 개 나란히 세워져 있고 대기업에 다니다 독립해 사업하는 아저씨는 기사가 딸린 차를 탔다고 했다.

 

철마다, 때마다 김장김치며 물김치며 늙은 부모님 농사지어 보내주신 채소며 나눠 먹었다. 지나고 보니 우리만 늘 줬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날 19층 아저씨 부도나고 아지매 우울증 왔다고 아내가 바빠졌다. 맛집을 순례하며 밥도 먹이고 산책이며, 등산이며 동행하여 웃음을 찾아주느라 오랜동안 애썼다. 고맙다고 하더란다. 신용불량자 된 아저씨 몇 년 후에 사업 시작했다.

 

어느 날 아파트 현관에 이삿짐 차 와 있고 사다리가 19층에 걸처져 있었다. 찾아가 보려는 아내를 말리며 짐 다 챙기면 당연히 들리겠지 했다.

 

근데, 그걸로 끝이었다.

17년간의 정을 인사 한마디 없이! 아내는 한동안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다가 끝내 허탈해했다. 어이없이 멸실 돼 버린 인간관계가 뿜어내는 화기를 숨기려 애쓰고 있었다.

 

오래 뒤,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후회 중인 아내는 아직도 산책길에서 가끔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며 안부를 궁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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