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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야그

그 사람의 뒷모습

★진달래★ 2005. 4. 27. 15:58
그 사람의 뒷모습  
고우영 화백 최후의 미완성작  2005/04/27 14:16 추천 0    스크랩 2

광활·유구한 중국 대륙 수천년 역사를 가로질렀던 그에게, 얄망궂은 운명은 마지막 소망을 그릴 여유조차 허락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준비했던 최후의 역작을 가슴에 묻은 채 떠났기에 그를 향한 아쉬움은 더욱 진하다. 2005년 새해를 이틀 앞둔 그날, 경기도 일산의 화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고우영 화백 얘기다.

 

고 화백은 가족사·만화사(史)를 두루 용해한 회고록을 구상 중이었다. “어려운 요즘 시기에 힘이 될 만한 얘기, 궁핍했던 지난 시절 지녔던 희망과 유머를 그림과 글로 표현해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싶다”는 뜻을 후배 허영만 화백을 통해 전했고, 그 구체적인 업무 진행을 위해 그의 작업실을 찾게 된 것이다.

 

격동기를 지낸 대개의 삶이 그럴 수 있겠지만, 고우영 화백의 생애는 미화·각색이 필요없는 그 자체 대하극이다. 예습 삼아 읽어 두었다가 고 화백을 만났을 때 화제로 올린 ‘한국 대표 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장상용 지음·크림슨)에는 그의 고생담·성공담과 여러 비화들이 적혀있다. 신문기사와 3년 전 방송 인터뷰 프로그램을 망라해 복원한 그의 삶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1938년 만주 태생인 고 화백은 1945년까지 그곳에 살면서 귀족 같은 삶을 누렸다. 고 화백 가족들은 일제 패망 후 중국인들의 공격을 피해 평양으로 이주했고, 평양 정착 후엔 북한 정권의 친일파 색출을 피해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겨가며 월남(越南)했다. 그와 가족의 생활수준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

 

6·25로 부산 피란 중 중학생이었던 그는 정규 미술교육은커녕 도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생계형 만화가이자 최연소 만화가로 입문했다. 1959~60년 만화가였던 큰 형과 둘째 형, 어머니가 한해 사이 잇따라 사망하는 불운을 겪는다.

 

그는 여행·사냥·낚시 같은 잡기에 능했고 아마추어 복서를 지내기도 했다. 고 화백은 “내가 그림은 뛰어나지 않아도 문장력은 좀 튀었지”라고 자신의 성공 비결을 풀이한 적이 있다.(황금찬 고3 담임교사와 김동리 주례 선생을 모신 이력을 보면, 그의 문재가 우연은 아닌 듯 하다.)

 

그는 1972년 ‘임꺽정’을 시작으로 ‘수호지’ ‘일지매’ 등 도둑 3부작을 일간스포츠에 연재하며 전성 시대를 열어 젖힌다. ‘삼국지’ ‘서유기’ ‘초한지’ ‘가루지기전’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 해석을 이어갔다.

 

그런 고 화백도 “마누라가 돈 꾸러 다녔고 편집국장을 찾아가 연재료 올려달라고 운 적도 있다”고 회고한다. “연재료 올려줘”란 글을 만화 대사 중에 슬그머니 올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만화말고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소재는 어디서 찾고 어떤 인물을 그리며 메시지는 어떤 칸에 담을까’ 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 드는 천생 만화쟁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변강쇠전’을 직접 연출했다고 한다. “영화사 측의 감독직 제안을 ‘영화에 대한 모독’이라고 한달 간 고사하다 겨우 맡았는데, 흑자도 냈고 다시 감독 맡으라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지독한 애주가였다. 대장암과 싸우면서도 “술 마셔도 되는 병은 없나...”라며 아쉬워 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술잔을 들이키며 “하늘이 데려 가려 한다면 따라야지 별 수 있나”라고 말하곤 했다.(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기질이 독특한 필치·시각과 상호 상승작용을 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고, 이는 적잖게 부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생의 종착역에 임박했음에도, 그날 경험한 그의 열정은 청춘 이상이었다. “벅차겠지만 독자들 호흡이 끊기면 안되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재해 1년 정도 끌어가고 싶다” “자유로운 화풍·글풍으로 독자들 심금을 울리겠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저없이 들려 주되 글과 그림의 비율 같은 구체적인 부분은 내게 일임해 달라” “인간미와 재미가 함께 가도록 하겠다. 신문 만화를 40년 그렸으니 적응도 돼 있고 자신도 있다” “내가 만들어낸 100명 넘는 캐릭터 중 누구를 이야기꾼으로 쓸지 결정해야 겠다” “신문사에 누가 된다면 가차없이 스스로 그만 두겠다”...

 

어린 독자를 어른으로 키웠고, 대포 나눠 마시며 얘깃거리 안주로 삼을 성인용 극화를 만들었으며, 국내 만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 놓은 그가 소박한듯 원대한 포부를 이어갔다. 그는 성겨진 머리칼을 보여주며 “주사 한번씩 맞을 때마다 힘이 쪽 빠진다”고 했지만, 이북식 억양이 섞인 또박한 음성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병중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선친의 업을 잇고 있는 그의 아들(고성언씨)은 당시 옆자리에 앉아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보태 주었다. 그런 화백에게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을 만큼 완쾌되셨는지” 같은 질문은 속된 것 같아 속으로 삭혀 버렸다.

 

회사로 돌아온 직후 인사 이동이 있어 짧게 맡았던 만화 분야를 놓게 됐고, 얼마 뒤 고 화백의 만화 자서전 연재 계획이 무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만난 지 넉달도 채 안 돼 맞이한 이틀 전 부고는, 힘겨운 현대사를 응축한 그의 삶과 함께 이런저런 의문 뒤섞인 ‘만약’을 떠올리게 했다.

 

좀 더 수월한 길을 놔두고, 화백은 왜 자신을 수십년 속박했던 매일 마감이 기다리는 신문 연재를 택했을까? 그것만이 살아 숨쉼을 확인할 길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연재를 맡았다면, 그는 필생의 작업을 얼만큼 완성했고 또 얼만큼 자족했을까? 세월보다 빨리 변하는 대중적 기호는 그의 감성과 호소력에 어떤 등급을 매겨 주었을까? ‘미완성작’으로 남았을 유작은 훗날 어떤 평가로 기록될까?

 

한국과 중국 역사의 숱한 영웅·민초를 재현했던 그가, 자신의 발자취를 형상화하는 데는 시간을 아껴두지 못했다. 삶의 매순간을 자신에게 주어진 최후의 기회로 여긴 듯한 그의 모습이 기억 속에 정지화면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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