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만나는 가지마다 다른 목소리로 운다

일터야그

방송국 가다

★진달래★ 2005. 8. 1. 16:57
 

 

녹화 1시간 30분 전,

 

저녁 먹고 방송국 들어가자 해서 이른 저녁식사를 하는데 “어른”은 확실히 긴장이 되나 봅니다. 예나 다름없이 찾은 단골식당에서 별스럽게 종업원과 여사장한테 짜증을 부리는 겁니다. 겨우 한쪽 집어먹는 양파를 얼른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이딴식으로 영업해서 어떻게 먹고살거냐고 심통을 부리질 않나 덮밥 위에 놓은 김이 굽지 않은 것이라고 여사장을 혼쭐을 내질 않나?


긴장되면 입맛도 변하고 그러니만은 후식으로 먹는 군고구마와 누룽지 삶은 숭늉은 꼭 챙겨 먹습니다. 돈 있고 권력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우리처럼 대충 한 끼 떼우는 식의 뭐 이런 거는 절대 없습니다.


그렇게 지청구를 들어가면서도 옆에서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떨어가며 고구마 까서 대령하고 숭늉 따르는 여사장이 옆에서 보기에 참 안쓰럽습니다. 에휴....돈이 웬수지......


그렇게 쪼아가며 식사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 창밖이 깜깜해집니다. “어른”이 연거푸 날씨 걱정을 하면서도 한번이라도 더 시나리오를 읽어 보겠다고 봉투를 여는 것이 방송이 겁나긴 겁나나 봅니다. 속으로 비 많이 와서 방송국 떠내려 갈까봐 그러냐? 핀잔을 하면서도 시나리오를 같이 봐 줍니다.


군데군데 밑줄씩이나 쳐 놓은 게 집에서 꽤나 공부를 한 모양인데 A4 17장이나 되는 걸 다 암기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를 안하고 있었습니다. 녹화 40분전...우산을 들고 나가니 기사가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그 좁은 골목 안 식당 문 앞에 1호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충성이 눈물겹습니다.


방송국에서는 7시30분 저녁 뉴스를 진행 중이라 45분까지 도착해 달라는 메시지가 옵니다. 서행하라는 지시가 내립니다. 스튜디오에 정확히 45분 도착. 마중 나온 PD 아나운서들과 악수를 나눈 후 분장실로 안내 되었습니다. 정확히 10분 분장에 10만원이랍니다. 동네 미장원 하루 10만원 벌려면 하루 내도록 퍼머 말아야 될똥말똥인데 그 참 비쌉디다.


탤런트 뺨치게 생긴 분장사가 젖가슴을 반쯤 들어내 놓고 분장하는데 섹시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파우더 비스무리한 걸 쓸쩍 한번에 뭐 한번 바르고 나더니 끝이라 합니다. 돈 벌기 쉽습니다. “어르신” 스튜디오로 입장하고 아나운서와 잠깐 리허설을 하는데 갑자기 이마의 땀을 닦기 시작합니다. 분장 다 지워집니다.


창밖의 PD 줌인, 줌아웃, 카메라원 슬로우, 당기고, 밀고, 뭐라 해쌓다가 몇 번 컷! 소리를 낸 후에 대담이 시작됐습니다. 경상도 말로 잘 씨부린다고 감탄할 정도로 말이 입에 착착 달라붙는 아나운서와 초장부터 바짝 얼어버린 "어른“의 지방자치 10년에 대한 평가 대담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어르신 몇 일간의 시나리오 숙독에도 불구하고 서너대의 방송카메라 앞에서 고개 한번 옳게 들지 못하고 아나운서와의 대담에 원고 읽어대기에 바빴습니다.


이건 아닌데 하는 PD의 표정과 카메라 기자가 너무 읽으신다고 걱정을 하지만 편집 없이 가는 방송이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정도로 난감해하는데 시나리오 쓴 저의 심정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40여분의 대담 아닌 책읽기 끝내고 테잎을 잠깐 돌려 시청한 후 “어른”은 방송사장실에서 차 한잔 하러 간 사이 느낌이 어땠었는지 카메라 기자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우리 “어른” 발음도 정확하고 잘 소화했다는 평을 합디다. 다아 체면치례로 하는 소리겠지만 우선 듣기에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평가는 TV를 시청한 시민이 내리는 거겠지만 10년의 시정을 다뤄 오신 분이 그렇게 원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생각하니 너무 답답하고 아쉬웠습니다. 하긴 10년 동안 줄창 써준 시나리오에 의존하여 “장“을 해왔으니 그 책임 저한테도 많다고 봐야하겠지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방송에 출연해야 할지 모르는데 어느 세월에 원고 없이 대담에 익숙해질는지 정말 앞날이 캄캄합니다.




'일터야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을지비상  (0) 2005.08.22
돌연사  (0) 2005.08.16
골프장 가다  (0) 2005.08.01
겁나는 금테모자 경비 아저씨  (0) 2005.07.28
바꿔야 돼!  (0) 2005.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