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내지 아부
며칠 전, 퇴근하는데 현관문을 열어주는 늦둥이가 “형아 전화 와서 엄마 또 운다!” 그럽니다. 간이 덜컹 합니다. 근 1주일간 아들이 힘들다고 호소를 하는데 정말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죽을 맛입니다. 부대하고 집이라도 가까우면 찾아가 보기라도 하겠는데 승용차로 6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에다 10월은 행사가 많은 달이라 휴가를 내기가 어려우니 더 애가 탑니다. 저녁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면 그럴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전화기 너머 아들의 소리죽여 흐느끼는 소리는 부모된 처지로 정말 듣기가 괴롭습니다. 소속된 특기병 8명 중에 제일 졸병이라 온갖 잡일은 다한다 치더라도 시도 때도 없는 히스테리성 고참들의 쌍욕과 괴롭힘이 도가 지나치나 봅니다. 그런 하소연을 듣다보니 마누라까지 같이 훌쩍이는데 마음도 아프고 화도 나고 그렇습니다.
사내자식이 그걸 못 견뎌서 그러냐고 처음에는 나무라기도 하고 오기로 버텨라! 남자대남자로 한번 들이대라! 네가 동작도 느리고 붙임성이 없어서 고참들이 너를 싫어하는 거 아니냐? 좀 웃고 사근사근하게 잘 보여라! 고참의 입장에서 너를 보면 네가 어떤지 잘 보일 거다. 아버지는 더한 군대 생활을 했다! 등등 여러 가지로 충고를 했습니다만 다음날이면 또 전화가 와서 정신분열증에 걸릴 거 같다고 하소연을 하니 그 충고들이 전혀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특히 괴롭힌다는 고참이 어떤 인물인가 물어 보니 오래전부터 하급자들에게 명성이 자자하게 괴물로 통하는, 그래도 명색이 서울 사대문 안의 대학을 다니다 온 친구라고 하는데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지 눈만 마주치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쌍욕을 퍼붓고 갈군다고 하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날마다 좋게 생각하자고 기도를 하고 내일은 좋아질 거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잠자리에 들지만 최근에는 긴장이 되어 잠도 잘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소심하거나 나약한 것이라고 나무라기도 했습니다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화기를 넘겨받으니 그냥 울기만 하는데, 아버지가 갈까? 하면 오지 마라. 그 괴롭힌다는 고참한테 편지를 쓸까? 하면 부대에 소문나면 찍힌다! 하니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더군요. 아무리 다독이고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해도 아침에 눈 뜨기가 두렵다고 하는 형편이니 그렇게 정화되고 민주화 되었다는 요즘 군대에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 밤새 뒤척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들이 교육생으로 있었던 특기학교에 전화나 한번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들이 특기학교에서 공부할 때 영어성적이 미국 유학파를 눌러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거든요. 인터넷을 뒤져 특기학교의 직원에게 전화를 해 아들을 말하니 반가워하더군요. 해서 형편을 말하고 배치 받은 부대의 담당직원 전화번호를 하나 알 수 없느냐고 했더니 보안사항이라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어쩝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라 사정사정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대의 복무를 담당한다는 부사관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지요.
안 좋은 일로 초면의 군 간부에게 하는 전화는 참으로 가슴이 무겁더이다. 신분을 밝히면서도 혹시나 이 전화가 자식에게 무슨 후환이 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더군요. 가능하면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제 자식하고 상담 한번 해주시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사관 되시는 분이 전화기를 안 놓더군요. 아무 걱정 마시고 무슨 일이신지 보다 상세하게 알아야 상담이 되지 않겠냐면서 자초지종을 묻더군요. 신뢰가 가더라고요.
아예 깨놓고 말하자 싶었습니다. 공무원 신분이라 저도 입장이 난감하다고 말하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아들이 힘들어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느냐?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면 민원을 넣어야 되는 거냐? 제가 아들의 상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사관 되시는 분. 아들 둘을 제대시켰다고 하면서 제 마음을 꿰뚫어 보시더군요. 아무 걱정 마시라고 왜 진즉에 전화를 하시지 않았냐고 하는데 서광이 비치더군요.
그런 이틀 후 어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가 전처럼 밝아졌더군요. 상담을 했고 고참의 처벌은 원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 고참도 불려가 상담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그런 일을 장교에게 일렀느냐고 두고 보자고 쌍욕을 퍼부으며 협박을 하더라네요. 오후에 다시 그 부사관이 아들을 불러 고참이 뭐라 하더냐고 캐물어 사실대로 대답을 했고 그 고참이 다시 불려가 상담을 하고 와서는 아들을 구석으로 부르더랍니다.
사과를 하더랍니다. 자신이 성격이 별나고 급해서 기분이 나쁘면 잘 조절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랍니다. 며칠이 갈지는 모르겠다고 하지만 일단은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듯 밥맛이 돌아왔습니다. 다 같이 귀한 집 자식끼리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가서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롭힘을 주고받는 것인지? 그게 또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아이들은 왜 모를까요?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제 마누라하고 늦둥이랑 산엘 갔다가 농장에서 단감을 몇 박스 사왔습니다. 택배로 보내주려고요. 물론 그 고마운 부사관하고 내무반 사병들 나눠 먹으라고요. 요 며칠간 속 앓이한 거 생각하면 정말 살이 다 빠지는 기분입니다.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주어지면 주변 사람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종족이 조선인이라더니 정말 언제 걱정 없이 자식을 맡길 수 있는 대한민국 군대가 될런지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