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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야그

휴가?

★진달래★ 2005. 8. 5. 09:49
 

 

학원 갔다 온 늦둥이가 뿔이 잔뜩 난 얼굴로 가방을 휙 던져두고는 소파에 엎드려 말을 안하더라는 것이다. 무언가 또 불만 사항이 생겼나 보다하고 가만히 두고 보았더니 한참 후에야 소파가죽 이음새에 얼굴이 짓눌린 채로 지엄마한테 “오늘 발표를 항개도 몬했다 씨이!” 하더란다.


뭔 발표냐고 물어봤더니 닷새를 쉬고 간 학원에서 아빠 휴가 중 재미있었던 일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우리 아빠는 휴가도 못가고 그래서 내 혼자만 발표할 게 없어 무지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다 휴가 갔다 왔더냐니까 누구는 어디가고 누구는 뭘 하고 줄줄이 꿰는 것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돈 많은 사람들 참 많구나 싶었다는 거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 아빠는 다 놀러갔다 왔는데 아빠는 바빠서 휴가도 못가고 더워도 쉬지 못하는데 너는 아빠가 불쌍하지도 않니? 하니 그제서야 고개를 끄떡끄떡하면서 그래도 부곡하와이는 한번 가보고 싶다 하더란다.


휴가철이 되면 직원 누구나가 다 황금시기에 떠나고 싶어하는 거고 사무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어중간한 고참 실무진들은 이 눈치 저 눈치 챙기다 늘 뒤처진 것이 한두해가 아니다.


평소 설움을 많이 당한다고 생각하는 직급 없는 직원들의 휴가가 우선적으로 배려되어 일번으로 가게 되고 두 번째로 정말 휴가가 필요한 청춘남녀 솔로들의 휴가가 이어지고 그 다음 상위직급들 그리고 어중간한 중간직급의 실무자들 순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늘 맨 마지막 아니면 8월 중순이 되고마는 것이라 아직 휴가 갈 차례가 못된 것 뿐인데 벌써 학원에서 그런 발표시간을 가졌으니 아이가 성질이 난 것이겠다.

 

올 상반기 자영업자들의 개인파산신고 건수가 작년의 전체기록을 넘어섰다는 발표도 있다시피 가정살림이 모두 어려운 모양인데 다들 멋진 휴가를 다녀왔을 거라고 지레짐작하여 그런 시간을 줘서 아이들 기분을 상하게 한 학원 강사의 단견도 놀랍거니와 제주도는 물론 하와이까지 왕림하고 오셨다는 어떤 아이의 아빠가 못내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뿔난 아이들을 달래느라 아내가 어제 애들과 시내에 나갔던 모양인데 블록과 게임기를 사주느라 돈이 다 떨어졌다고 아침에 지갑을 홀랑 털어갔다.


따로 휴가비가 나오는 직장도 아닌 터에 무슨 휴가씩이나 가라고 지침을 내리고 주5일제를 시행하여 가난한 말단의 속을 긁어대는지 모를 일이다.

 

내주에 한 사흘 쉬면서 낚시나 가고 저녁에는 야구나 보러가자고 했더니 피이~~하는 모양새가 낙제아빠로서의 돌이킬 수 없는 위치를 재확인해 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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