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만나는 가지마다 다른 목소리로 운다

빌린야그

부부 -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나?

★진달래★ 2006. 8. 24. 14:16

부부-이계숙(중앙일보기자)

 

지난 번 칼럼, '바람나는 사람들' 을 읽었다는 어떤 남성이 내 웹사이트에 글을 하나 남겼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이 삭막한 미국 땅에서 상대를 만났답디까? 설마 프리웨이 운전하다 눈 마주쳐 만난 건 아닐 테고.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요....'

 

나는 마악 넘기려던 커피를 모니터에 뿜으며 걀걀걀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부럽다-. 얼마나 솔직한 심경을 잘 함축한 표현인가.

 

알콩 달콩, 매일 꿈같은 나날을 보내는 신혼부부라면 모를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미건조하고 변화 없는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의 일탈을 꿈꾸었을 테니까.

 

용건 없이는 생전 전화를 하지 않는 H씨가 그 주 토요일 아침 연락을 해 왔다. 신문에서 내 글을 봤다면서 도대체 그 바람난 세 사람이 누군지 묻는다.

 

K씨는 내 글 때문에 남편과 한바탕 했단다.

만약 자기가 바람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남편의 물음에 K씨가 망설이지도 않고 "어떻게 하긴? 당장 이혼이지." 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란다.

 

빈말로라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말을 해줄 줄 알았다며 남편이 섭섭해 했다고 했다.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갔다는 건 벌써 내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증거 아닌가. 마음 떠났던 남편, 몸만 돌아온다고 절대 받아 줄 수 없지. 흥, 바람날 테면 나라지. 바람도 젊었을 때 말이지 능력도 힘도 없는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를 누가 받아나 준대?"

 

얼마 전 복권 당첨금이 수천 만불로 올랐을 때 모였던 예닐곱명이 의기투합해 복권을 샀던 일이 있다. 당첨되면 상금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걸로 약속하고서.

 

그 중 한사람이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복권이 당첨되면 당신들은 제일 먼저 뭘 할 거야?"

누군가가 냉큼 대답했다.

 

"뭘 하긴 뭘 해? 제일 먼저 이혼부터 해야지."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복권은 꽝이었고 그는 이혼을 못했다.

며칠 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말했다.

"이혼할 팔자도 못 되는 모양인데 그냥저냥 사슈. 이혼은 아무나 하나."

 

내 주위에는 썩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매우 이상적으로 보이는 부부들도 한 걸음만 더 가까이 가서 보면 온갖 갈등과 문제를 안고 산다.

 

그래도 이혼을 하지 않는 건 아이들 때문, 그리고 자신들의 체면 때문이요, 지금의 상대방과 헤어진다한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어서 그냥저냥 산다는 것이다.

 

Q씨는 가끔 아내랑 당장 이혼하고 새 여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새로운 사람과 시작해야 하는 그 복잡한 절차가 싫어서 못하고 있단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 탐색전을 펴야하고 취미가 뭔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아가야 하는 그 번거로운 절차, 생각만 해도 성가시네.

 

젊었을 때야 가슴 두근거려가며 했겠지만 지금은 만사가 귀찮아서."

귀찮아서 새 인연을 만들기 싫다는 말은 지금 아내와의 사이가 마치 오래 입은 옷처럼 편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평생을 원수처럼 지내던 남편과 사별한 지 십년이 넘은 한 여성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혼자 지내고 있다. 남편과 똑같은 사람을 또 만날까 봐 겁이 나서 남자를 못 만나겠다는 것이다.

 

그녀 남편은 십 몇 년을 멀쩡하게 잘 부어가던 생명보험마저 해약을 해놓고 죽은 사람이다. 그것도 바로 죽기 한 달 전에.

 

자신이 죽을 걸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남편 장례를 치른 후 보험회사로부터 이 사실을 확인받고는 망자에 대해 남아 있던 일말의 슬픔마저 내던진 채 이를 북북 갈고 말았단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부부는 서로 안 맞아도 어쩌면 저렇게 안 맞을까 싶을 정도로 안 맞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관계는 늘 끊어질 듯 아슬아슬 위태롭기 그지없었는데 언젠가 남편 되는 사람의 하소연을 들어 줄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는 말했다.

 

그동안 진짜 죽지 못해 살았었는데 이번에야말로 결단을 내렸노라고.

신앙에 기대어 '모두 다 내 업보요,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 라고 마음을 바꾸어도 보고 골프 등 취미생활로 눈도 돌려보며 갖은 노력을 했었지만 갈수록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아서 도저히 이혼을 하지 않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겠다는 것이다.

 

한 시간 가량 그의 하소연을 들어보니 이 부부야말로 진짜 헤어지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는 할 수 없는지라 조언이랍시고 한 마디 했다.

 

종이에다 부인의 싫은 점과 좋은 점을 써 내려가다가 좋은 점이 싫은 점 보다 더 많으면 그래도 괜찮은 여자구나, 그냥 마음 바꿔 살라고.

 

내 조언이 어느 정도 먹혔는지 금방이라도 이혼할 듯 하던 그 부부는 아직도 같이 살고 있다.

 

결혼생활이 행복해 죽겠다며 온갖 요란방정을 다 떨던 연예인들이 몇 년도 못 가 이혼하는 걸 보면서 부부란 집에 있는 가구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 있기 때문에 별 관심을 주지 않다가도 없으면 빈 자리가 금방 드러나는 가구, 오래된 가구.